1. 이해와 집중이 쉬웠어요
스토리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의 행동, 생각에 대한 디테일이 잘 묘사되어 있어 후반부까지 몰입감을 가지고 쫓아갈 수 있었다. 또한 적은 등장인물과 외우기 쉬운 캐릭터의 이름(담, 구, 노마 등) 덕분에 쫓아가기 쉬웠던 것도 분명 적지 않은 영향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초반부 내용을 놓쳤음에도 불구하고 후반부 내용까지 몰입도 있게 따라갈 수 있었다. (소설 초반에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기 위한 캐릭터의 성격이나 사건의 전말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 마련이다.)
2.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전개를…
<구의 증명>을 읽으면서 작가가 ‘좁고 깊게 생각하는’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흔히 장편 소설에는 액자식 구성을 연결해가며 크고 작은 사건, 스토리를 연결하지만, 반대로 <구의 증명>에서는 굵직 굵직한 스토리만을 남겨 놓았기에 담과 구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당시 감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구의 증명>은 사건의 전말을 풀어내기 위한 전략으로 시대적 배경을 직렬이 아닌 적절히 뒤섞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덕에 단순한 스토리에도 박진감과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3. 가장 원초적인 감정
인간이 지닌 가장 원초적인 감정(본능)은 사랑과 분노이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전두엽이 커졌지만 새로운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다. 단지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거나 숨길 수 있을 뿐이다. 담과 구의 인생은 전두엽이 쓸모가 없다고 느껴질 만큼 절박하고 잔인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과 분노의 감정만이 또렷이 보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본능적이었다.
무한한 고통이 그들을 옥죄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사랑을 뛰어넘은 무언가를 서로에게 느끼게 된 것 같다.
4. 이기적인 사람만 있을 뿐이다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맑음이를 행복하게 하려고 치킨을 사줬어” 이 말에는 함정이 있다. 사실 맑음이를 행복하게 함으로써 내가 기분이 좋아지려고 치킨을 사주는 것이다. 상대방은 긍정적인 감정을 얻어도 내가 부정적인 감정을 얻는다면 그 누구도 그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기적임에서 이타적임도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 또한 그러하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내가 행복하려고 만나는 것이다.
담은 극한의 상황을 맞딱뜨리고 더 이상 행복을 위한 사랑을 하지 않게 된다.
5. 담을 담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구
담은 대부분의 감정이 소거되고 구를 만날 때만이 담으로서 살아가는 순간이 된다. 처음엔 설렘이, 지나면서 사랑으로, 더 나아가서 담의 역사를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남게 된다. 구가 없어지면 담이 가지고 있는 노마와 이모에 대한 추억이 온전히 자신에게만 남게 된다.
“불행해도 되니까 같이 있자”라는 한 마디에는 ‘서로가 서로를 증명한다’라는 목적성이 담겨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담이 행복하기 위해서도, 구가 행복하기 위해서도 아닌 단지 존재의 이유로서 말이다.
6. 구에 대한 집착
구가 죽을 때 담은 구를 태우거나 땅에 묻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이 기이한 행동처럼 보이는 것은 구에 대한 강한 집착의 결과인 것 같다. 담에게 있어서 구는 ‘평생을 기다릴 존재’였고 유일한 삶의 이유였으나 눈 앞에서 그 이유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담은 그 사실을 부정이라도 하듯이 그의 살점을 자신의 육체에 우겨넣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의 담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자아붕괴를 막기 위한 방어기제로 미쳐버리거나 모든 의욕을 잃고 강한 자살충동을 느꼈을 것 같다는 추측만 내 뇌속을 멤돌았다.
7. 구의 끝은 온전한 사랑의 시작
구가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며 담을 바라보며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 다음 두 인용문에서 구의 죽음이 진정한 사랑의 시작임을 얼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너와 있는데 너는 나를 느끼지 못한다. 아직 노마도 이모도 만나지 못했기에 담이 죽어서라도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언젠가 네가 죽는다면, 그때가 천 년 후라면 좋겠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는 살 수 있었어도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아서, 너 없는 세상은 죽음이고 그래서 난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구에게 있어서 죽음은 담이 없는 삶이다. 흔히 생각하는 생명의 끝이 죽음이 아닌 것이다.
정말로 구가 죽음을 맞이하자 다른 걱정과 스트레스 없이 온전히 담을 느낄 수 있었고 죽었다. 노마와 이모처럼 죽어서 담을 다시 만날 보장이 없으니 담을 느끼고 있는 지금 이대로 1000년이 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원이 아닌 1000년인 것은 담이 영원한 외로움은 피하기 위함일까? 1000년이라는 시간이 구에게는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의 기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유일하게 이기적인 사랑, 본능적인 사랑이 시작되는 구간이 그의 마지막에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담도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말이다.
그의 사랑이 증명되는 마지막이자 시작인 셈이다.
작가의 말
1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작가를 만났다. 담이 시신을 먹은 까닭부터 물었다. “두 사람은 세상에 그들밖엔 보이지 않았어요. 담이 구를 따라 죽으면 둘은 아예 세상에서 없는 게 돼요. 담은 구를 먹으면 피와 살이 되니 오래 살 수 있고 자신 안에 구를 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먹으면서 구의 존재를 증명한 거예요.”
소설에서 둘을 고립시키고 외롭게 만드는 장치는 빚이다. 대부업체는 지옥이라도 찾아가서 돈을 받아내려 한다.
작가는 “요즘 세상에 빚내서 학교에 다니고 집을 사는 모습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내가 보기엔 활활 타는 불덩이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이다. 지금 생활과 미래를 저당 잡히는 빚 권하는 사회에 대한 생각도 녹였다”고 했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노력을 했으면 해요. 구를 먹는 담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된다면 타인의 불행을 예민하게 여기는 감각이 살아있는 거겠죠. 그런 예민함이 있으면 살면서 고통을 느낄 일이 많겠지만, 그래도 그 예민함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작가의 말을 듣고 난 후
내가 해석한 구의 증명은 구의 사랑을 죽어서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작가는 담이 먹고 세상에 구가 존재함을 증명했다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듣고 완전히 소름이 돋아버렸다. 구가 없는 삶에서 느낀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곳에서 더 이상의 담에 대한 스토리는 없는 줄 알았으나 구를 먹고 자신에게 구를 묻음으로써 담은 삶을 끝내지 않을 수 있었다.
담은 이 상황을 자기방어기제로 미쳐버리거나 자살로 타개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식인’이라는 방법으로 구를 증며하고 살아갈 수 있다니… 놀랍고 소름돋는다. 작가의 해석을 보면서 내가 보지 못한 캐릭터의 성격을 마주할 수 있었다.